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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개인이 무리를 지으면 집단광기가 발생할 수 있다. 특정인의 인형을 두들겨 패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 섬뜩하다. 광장은 비이성적 집단광기와 파괴가 허용되는 공간이다. 증오심 가득한 정치 팬덤이 특정 정치세력에 포획되어 한쪽만 보고 한 목소리만 내도록 조종받는다면 새 정치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옷을 입은 바람이 각종 선거를 비롯해 크고 작은 민감한 이슈의 향방을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한류 열풍도 감성적 성향과 무속적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라고 말한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는 "무속적 상상력의 특징은 감성적 충동과 즉흥성에 있다. 여기서는 형식적 균형을 깨는 파격, 비대칭을 낳는 역동적 흐름이 관건이다. 무속적 역동성은 단순히 질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떤 무질서의 질서, 비형식의 형식이다. 물론 이런 역동성은 비합리적 충동과 광신적 맹목으로 빠져들기 쉽다. 무속적 상상력이 통제 불가능한 광기로 번져갈 가능성, 이 끔찍한 위험성이 과거 한국문화의 진보와 좌절을 모두 설명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광신적 맹목은 전후좌우와 논거의 타당성은 따져보지 않고 증오가 냄비처럼 끓게 하여 과격한 집단행동을 부추긴다. 지나친 감성팔이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해 질 무렵 겨울 들판을 찾았다. 초저녁별이 뜨는 하늘에 기러기가 무리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윤석중의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를 나직이 흥얼거리다가, 윤복진의 '기러기' 3절을 불러 본다. "오동잎 우수수 지는 달밤에/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엄마엄마 울고 간 잠든 하늘로/기럭기럭 부르며 찾아갑니다" 자식을 찾는 어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기러기는 시베리아, 사할린, 알래스카와 인접한 러시아 최동북단에서 번식을 마치고 겨울에 우리나라로 온다. 이들은 강화도, 연천군, 철원평야 등지에서 떨어진 벼와 식물 뿌리 등을 먹으며 지친 몸을 추스르며 원기를 회복한다. 그런 다음 더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 2월까지 머무르다가 다시 추운 곳으로 돌아간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있지만, 서열이 없다. 대장 기러기가 무리를 지배하고 나머지가 무조건 복종하며 따르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비행한다. 앞에서 나는 새가 날개를 저으면 뒤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진다. 이런 비행을 하면 혼자 날 때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V 대형은 힘도 절약하고 길도 잃지 않게 한다. 선두에서 동료를 이끌던 기러기가 지치면 후미로 물러나고 뒤따르던 한 마리가 앞서서 무리를 이끈다. 돌아가며 선두에 서기 때문에 앞선 자의 우월감이나 뒷자리의 열등감도 없다. 서열 다툼이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에너지를 무리의 효율적인 비행에 바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안전하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비행 중에 구성원 누군가가 총에 맞거나 아파 대열에서 이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빠져나와 아픈 동료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한다. 함께 남게 된 건강한 두 마리는 낙오된 동료가 회복하거나 죽을 때까지 같이 머물러 준다.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종료되면 그들은 다시 무리에 합류한다. 기러기가 날아가며 우는 것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다. 우리가 듣는 그 울음소리는 실제 우는 소리가 아니다.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들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다. 서로를 독려하는 일종의 노동요라고 할 수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비행술과 서로 격려하며 힘을 주는 울음소리가 없다면 기러기는 따뜻한 땅과 먹이를 찾아 그 먼 길을 날아갈 수 없다. 톰 워삼의 '기러기'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러기는 고난의 먼 길을 함께 간다. 그들이 터득한 생존 비법은 무리를 위한 희생정신, 상호 배려, 신뢰의 마음이다. 광장에 모인 저 사람들도 한 번쯤 텅 빈 들판에 서서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충혈된 눈을 순화하고 집단 광기와 적개심을 상생과 공존, 사랑의 에너지로 바꿀 수는 없을까.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