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현지시간) 래플러 등 현지매체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필리핀은 이날 오전 7시부터 중간선거 투표를 시작했다. 투표는 같은 날 오후 7시까지 진행된다. 필리핀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간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낮았으나 이번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부녀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과 불화가 쟁점으로 떠오르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24명으로 구성된 상원 의석 중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선출하게 되는 절반의 의석인 12석을 놓고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의 치열한 '대리전'이 펼쳐지고 있다.
필리핀 하원은 지난 2월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는데, 오는 7월 실시될 예정인 탄핵재판의 최종 결정은 상원의원들에게 달려있다. 24명의 상원의원 중 3분의 2 이상이 찬성할 경우 탄핵이 확정되는데, 이 경우 사라 부통령의 공직 진출은 영구적으로 제한된다. 아버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뒤를 잇겠다는 희망이 원천 차단되는 셈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에게도 상원 의석이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입법과 여론 형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상원의 의석을 최대한 확보해야 마르코스 대통령도 남은 임기는 물론 이후 2028년 대선에서 원하는 승계 구도를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가문의 '생존'이 걸린 탓에 이번 중간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 아루가이 필리핀대학교 정치학 교수는 "이번 선거는 마르코스 정권의 중간평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상원선거는 (두 가문의) 핵심적인 대리전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입법·경제 정책을 추진하려면 과반 혹은 절대다수(의석수 3분의 2 이상)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필리핀 언론들도 "상원선거야말로 진짜 전장"이라며 상원 선거의 결과가 향후 정국 주도권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동맹 깨지고 적으로 마주한 마르코스-두테르테
필리핀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이 마르코스·두테르테 두 가문은 지난 2022년 대선 당시 손을 맞잡고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과 사라 부통령의 연합은 불과 2년 만에 무너졌다. 이후 양측은 개인적인 비방·정치적 공방을 주고 받았고 이 갈등은 급기야 사라 부통령의 탄핵으로까지 치달았다.
사라 부통령은 공금 유용·불법적인 자산 축적·대통령 부부와 하원의장에 대한 암살 위협 발언 등으로 지난 2월 상원에 탄핵안이 상정된 상태다. 사라 부통령의 탄핵에 이어 로드리고 전 대통령도 지난 3월 11일 필리핀 경찰과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체포됐다. 재임 당시 실시한 '마약과의 전쟁'에서 반인도적 살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했는데, 마르코스 정부가 인터폴의 수배 요청에 협조하며 이뤄진 체포다.
로드리고 전 대통령은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ICC에 구금 중이다. 오는 9월 첫 재판을 앞두고 있는 로드리고 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다바오시 시장 후보로 출마한 상태다. 다바오는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22년간 시장직을 지냈던 '정치적 고향'으로 현재도 그에 대한 지지가 높고 두테르테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한 곳이다.
1만 1000㎞가 떨어진 네덜란드 헤이그에 구금 중이지만 "필리핀 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에만 후보 자격이 제한된다"는 현행법 탓에 로드리고 전 대통령의 시장직 도전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국제재판소 구금이나 기소가 자격박탈 사유에 해당하지 않고, 당선 이후에도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막내아들 서배스천 두테르테가 부시장으로서 시장 직무를 대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 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아버지 로드리고 전 대통령을 외국법원에 넘긴 행위는 "필리핀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라며 마르코스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는 "두테르테 가문이 사라져서 이익을 얻는 이가 누구일지, 국민들이 생각해야 한다"며 "이익을 보는 것은 필리핀 국민들은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사라 부통령의 탄핵과도 거리를 두고 있고, 두테르테 가문에 대한 보복이란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이번 중간선거에서 경제 성장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재에서의 주권 수호를 주요 이슈로 내세우며 외교·안보에서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