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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화 칼럼] 복합 위기의 시대, 한국 경제의 생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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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4. 12. 17:21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이종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
한국 경제는 지금 복합적인 위협 요인 속에서 상당한 위기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위기(crisis)'라는 말의 어원은 환자의 생사가 갈리는 순간을 의미한다. 경기 변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일정 수준을 넘는 충격은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실물과 금융경제 전반을 흔드는 체계적 위기로 확산된다. 지금의 한국 경제는 바로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네 차례의 큰 경제위기를 겪었다. 1970년대 말 석유파동,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다. 이 시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급락하며 경제·사회 전반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 위기는 대체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글로벌 금융 불안, 감염병 확산 등 외부 요인에서 촉발되었지만, 동시에 높은 대외 의존도와 금융 취약성 같은 내부 요인이 결합되며 충격이 증폭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매번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위기 이후 구조개혁과 정책 대응을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성장 경로로 복귀했다. 이는 한국 경제가 외부 충격에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회복력을 지닌 구조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급 충격과 금융 불안이 동시에 진행되며 훨씬 복잡하고 구조적이다. 에너지와 핵심 자원의 공급망은 지정학적 갈등에 의해 흔들리고 있고, 글로벌 금융시장은 높은 금리와 자산가격 변동 속에서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단일 충격에 대응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충격이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세계 경제 질서의 근본적 전환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 중심의 국제경제 질서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최근 미국은 보호무역과 산업정책을 강화하며 '자국 우선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다. 그 결과 무역과 투자, 기술은 더 이상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은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시키고 기업 투자 결정을 위축시키며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에너지와 핵심 자원을 둘러싼 전략적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반도체, 희토류, 배터리 원료, 원유와 가스는 이제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니라 국가 안보 자산이다. 각국은 자원 확보와 생산 거점 통제를 강화하며 공급망 안정성을 추구하고 있고, 이는 글로벌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중동의 군사적 충돌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핵심 수송 경로의 충돌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공급망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세계 경제는 블록화되고 있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술, 공급망, 금융이 우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지경학적 분열'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더 이상 글로벌 협력에 의존한 안정적 성장 경로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이 경쟁은 동아시아에서 더욱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첨단 제조업이 집중된 이 지역은 미·중 전략 경쟁의 최전선이 되었으며, 공급망 재편과 기술 통제는 경제를 넘어 안보 불확실성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지정학과 지경학이 교차하는 핵심 공간이 되고 있다. 한국은 높은 대외의존도 속에서 미국과 중국에 동시에 의존하는 구조를 갖고 있어 안보와 경제 측면에서 동시에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유무역에 기반한 수출 중심 성장 모델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은 더욱 크다.

이번 위기는 과거처럼 대응하면 회복되는 성격이 아니라, 대응하지 않으면 성장 경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구조적 위기다. 과거 위기에서는 국제 공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9년에는 국제 에너지 협력이, 1997년에는 IMF 지원이, 2008년에는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가 위기 극복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국이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더구나 한국 경제는 이미 고령화, 부채 증가, 생산성 하락, 산업 간·기업 간 불균형 심화로 내부 성장동력까지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경제가 선택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공급망과 무역의 전략적 다변화와 함께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등 전략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 내 핵심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구조적 위험이다. 둘째, 에너지와 핵심 자원의 안정적 확보다. 이는 비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셋째, 금융 안전망의 제도적 강화다. 외환보유액뿐 아니라 통화스와프 등 다층적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아울러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미·중 경쟁 속에서 개별 대응보다 지역 협력이 보다 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신기술과 인적자본 확충을 통해 성장동력을 회복해야 한다. 공급망과 금융 안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장기적으로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높이지 못하면 위기 대응도 지속될 수 없다. 경제의 지속가능성은 외부 대응 능력뿐 아니라 내부의 성장동력과 사회적 신뢰에 달려 있다.

이번 위기는 지나가는 파도가 아니라, 경제의 지형 자체가 바뀌는 구조적 전환이다. 이제 한국 경제는 대응하지 못하면 구조적으로 뒤처질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라, 냉정한 진단과 전략적 선택, 그리고 실행의 속도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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