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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이미지와 뭉개진 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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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5. 31. 17:59

엄정순, <찰나 2001-1>, 2026
엄정순, <찰나 2001-1>, 2026, 점자교과서 1,000권, 알루미늄 프로파일, 선풍기, 250x1000x890x800cm, 가변설치 / 이미지출처: 학고재 갤러리
엄정순(b.1961)의 '찰나 2001-1'(2026)는 천 권의 점자책을 갤러리의 디귿자 공간에 설치한 작업이다. 눈이 아닌 손끝으로 읽는 점자책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의 점자책은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과는 달리, 책장의 기능을 하는 알루미늄 프로파일에 펼쳐진 채 설치되었다. 마치 비밀스러운 책들로 가득한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쓴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eca de Babel)'(1941)을 연상시키듯 책들을 읽으려 해도 책 속의 글자를 모르니 그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

침묵처럼 글자가 보이지 않는 이 하얀 책들 '찰나 2001-1' 앞에는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2026)이라는 제목의 점자책 한 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다행히도 점자 텍스트 행간에 번역된 목탄으로 쓴 손글씨가 병기되어 있다. 16~8쪽 분량의 점자책은 관람객 누구나 눈 혹은 손으로 읽거나 만질 수 있다. 점자를 읽기 위해 손끝은 책의 표면을 눌러 만진다. 이때 점자를 촉각으로 읽는 손은 동시에 글자를 뭉개버린다. 이러한 반복적 손의 읽기 행위는 매끄러웠던 종이 표면에 보푸
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이 점자책은, 어떤 이들의 손은 본다는 눈, 즉 시각 행위가 결코 닿지 못했던 만남과 관계로 인한 복잡한 마찰과 갈등, 사랑, 찬미와 애도 등으로 이어질 깊은 여러 실존의 현실을 파동처럼 드러낸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다. 첫 장은 '독자를 위한 안내'로 시작되고 있다. "이 책은 흑연으로 기록되었네. 그대가 점자를 읽을 때마다 그 아래 적힌 글자들은 뭉개지고 지워질 거야. 허나 겁내지 말게. 글자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흔적이 남는 것. 그것만이 이 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리고 "아주 먼 옛날 나는 도서관의 모든 책을 덮고 광장으로 나갔다네. 그곳에는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거대하고 흐릿한 덩어리가 하나 서 있었지. 사람들은 그것을 코끼리라고 불렀으나 나는 그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없는 우주라고 기록해 두었네 / 나는 눈을 가린 자들을 불러 이렇게 명하였네. 자, 손을 뻗어 이 덩어리의 모서리를 읽어 보게. (…중략…) / 첫 번째 손이 닿자 "손끝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거대한 부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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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학고재 갤러리
왕이 대답한다. "방금 그대가 문질러 지워버린 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수신하는 귀였다네." 이제 글자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구나. / 두 번째 손이 지나간 자리에 글씨가 검게 번진다. "차갑고 매끄러운 느낌입니다. 땅속 깊이 박힌 창의 파편 같습니다."

왕이 말한다. "자네 손끝에 검게 묻어난 그것은 아주 긴 시간을 견뎌온 매끈한 상아라네. 보게나 상아라는 단어는 죽었고 차거운 침묵만 묻어 있지 않는가."/ 세 번째 손길에 문장들이 안개처럼 변한다. "끝이 없는 벽입니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우리 앞을 꽉 막고 있는 벽의 연속입니다."

왕이 말한다. "자네가 더듬어서 허물어뜨린 그 벽은 사실 생명을 품어주는 따뜻한 몸통이었다네. 벽이란 글자가 지워져야 비로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이지"./ (중략) /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왕이 말한다. "자 이제 그대들의 손가락을 보게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 다 뭉개져서 그대들의 지문 사이에 검은 보푸라기처럼 박혀버리지 않았는가. 책 속의 코끼리는 사라졌네만 진짜 코끼리는 이제 그대들의 손끝에 스며들었다네. 우리는 읽음으로써 지웠고 지워진 덕분에 비로서 만질 수 있었네. 이제 책을 덮으시게나. 자네의 그 검게 얼룩진 손끝 속에 보이지 않는 코끼리가 서 있으니."

엄정순의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은, 30년 전 점자책 몇 권만이 쓰러져 있는 작가 자신의 기억 속 어느 맹학교 도서관에서 시작되어 지속된 질문과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불교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의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와 보르헤스가 우주로 지칭한 바벨의 도서관이 교차하는 이 작업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라는 뻔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금 불러들인다.

엄정순,〈코 없는 코끼리 K〉
엄정순,〈코 없는 코끼리 K〉, 3Dprinted high-density Styroform, Cement, Curestone, 240(h)x219.2(w)x245.6(d)cm, 2026. 600여전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코끼리의 디아스포라를 배경서사로, 한반도 역사에 존재했던 이방의 동물 코끼리서사가 담고 있는 분리, 혐오, 생명, 결핍의 요소들을 신체의 재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이 설정한 좌표로서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우리의 시각·관점은 동일하게 판단되어 왔다. 그 좌표로 집중되는 획일성과 경직성을 경계하며 시각과 이성중심의 사회를 비판한지도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엄정순의 작업은 거듭 질문하고 있다. 손끝으로 읽어 뭉개진 글자 때문에 일어난 '보푸라기'가 우리는 진정 아름다운가, 그리고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셀피와 인스타그램이 주도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김주원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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