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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처럼 글자가 보이지 않는 이 하얀 책들 '찰나 2001-1' 앞에는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2026)이라는 제목의 점자책 한 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다행히도 점자 텍스트 행간에 번역된 목탄으로 쓴 손글씨가 병기되어 있다. 16~8쪽 분량의 점자책은 관람객 누구나 눈 혹은 손으로 읽거나 만질 수 있다. 점자를 읽기 위해 손끝은 책의 표면을 눌러 만진다. 이때 점자를 촉각으로 읽는 손은 동시에 글자를 뭉개버린다. 이러한 반복적 손의 읽기 행위는 매끄러웠던 종이 표면에 보푸
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이 점자책은, 어떤 이들의 손은 본다는 눈, 즉 시각 행위가 결코 닿지 못했던 만남과 관계로 인한 복잡한 마찰과 갈등, 사랑, 찬미와 애도 등으로 이어질 깊은 여러 실존의 현실을 파동처럼 드러낸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다. 첫 장은 '독자를 위한 안내'로 시작되고 있다. "이 책은 흑연으로 기록되었네. 그대가 점자를 읽을 때마다 그 아래 적힌 글자들은 뭉개지고 지워질 거야. 허나 겁내지 말게. 글자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흔적이 남는 것. 그것만이 이 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리고 "아주 먼 옛날 나는 도서관의 모든 책을 덮고 광장으로 나갔다네. 그곳에는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거대하고 흐릿한 덩어리가 하나 서 있었지. 사람들은 그것을 코끼리라고 불렀으나 나는 그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없는 우주라고 기록해 두었네 / 나는 눈을 가린 자들을 불러 이렇게 명하였네. 자, 손을 뻗어 이 덩어리의 모서리를 읽어 보게. (…중략…) / 첫 번째 손이 닿자 "손끝에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거대한 부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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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말한다. "자네 손끝에 검게 묻어난 그것은 아주 긴 시간을 견뎌온 매끈한 상아라네. 보게나 상아라는 단어는 죽었고 차거운 침묵만 묻어 있지 않는가."/ 세 번째 손길에 문장들이 안개처럼 변한다. "끝이 없는 벽입니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우리 앞을 꽉 막고 있는 벽의 연속입니다."
왕이 말한다. "자네가 더듬어서 허물어뜨린 그 벽은 사실 생명을 품어주는 따뜻한 몸통이었다네. 벽이란 글자가 지워져야 비로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이지"./ (중략) /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왕이 말한다. "자 이제 그대들의 손가락을 보게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 다 뭉개져서 그대들의 지문 사이에 검은 보푸라기처럼 박혀버리지 않았는가. 책 속의 코끼리는 사라졌네만 진짜 코끼리는 이제 그대들의 손끝에 스며들었다네. 우리는 읽음으로써 지웠고 지워진 덕분에 비로서 만질 수 있었네. 이제 책을 덮으시게나. 자네의 그 검게 얼룩진 손끝 속에 보이지 않는 코끼리가 서 있으니."
엄정순의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은, 30년 전 점자책 몇 권만이 쓰러져 있는 작가 자신의 기억 속 어느 맹학교 도서관에서 시작되어 지속된 질문과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불교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의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와 보르헤스가 우주로 지칭한 바벨의 도서관이 교차하는 이 작업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라는 뻔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금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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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피와 인스타그램이 주도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김주원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