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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원화의 신뢰를 지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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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7. 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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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규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난 6월 평균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서는 등 고환율이 지속됨에 따라 시장에서는 "이 정도면 뉴 노멀"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원화 약세를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 뒤에 숨은 경제의 취약성을 놓치게 된다. 환율은 단순한 외환 수급의 결과가 아니다. 한 나라의 상품과 금융자산, 나아가 그 나라의 미래 성장잠재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성적표다. 외국인이 우리 주식과 채권을 사려할 때 원화 가치는 올라간다. 반대로 투자자들이 원화 자산보다 달러화 자산을 선호하면 원화 가치는 떨어진다. 지속되는 원화 약세를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MF와 각국 중앙은행 자료를 보면 '뉴 노멀'이라는 말은 더 힘을 잃는다. 2025년 6월과 2026년 6월의 월평균 환율을 비교하면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10.5% 하락해, OECD 회원국 가운데 튀르키예 리라(-14.8%) 다음으로 낙폭이 컸다. 일본 엔화(-10.1%), 대만 달러(-6.1%), 캐나다 달러(-2.6%)보다도 약세가 두드러졌다. 같은 기간 유로화 가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원화의 급격한 약세를 세계적인 달러 강세나 보편적인 흐름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외환위기란 보유 외환이 급감하고 환율이 폭등해 나라가 대외 지급 능력을 잃는 상황이다. 1997년 위기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과도한 단기외채, 부실한 외화유동성 관리에서 비롯됐다. 당시 정부 재정은 비교적 건전했지만, 기업과 금융기관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그 대가로 민간의 외화 건전성은 개선됐다. 문제는 오늘의 위험이 다른 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되풀이되는 재정적자, 불어나는 국가채무와 공기업 부채가 통화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을 수 있다.

남미의 외환위기들은 대체로 같은 길을 걸었다. 정부가 세금 수입을 초과하는 재정지출을 남발하고 그 적자를 화폐 발행으로 메우면, 자국 통화가치는 떨어진다. 투자자들이 달러로 몰려가면 정부는 보유 달러를 풀어 환율을 방어하지만, 보유 외환이 바닥나는 순간 투기적 공격과 환율 폭등을 피할 수 없다. 이른바 '제1세대 외환위기'의 전형이며, 아르헨티나가 이를 되풀이해 온 대표 사례다. 결국 관건은 정부가 부채를 감당하고 통화가치를 지킬 능력이다.

한국의 일반정부 총부채 비율은 아직 OECD 평균보다 낮지만, 증가 속도는 결코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일반정부 부채(D2)는 2019년 국내총생산의 42.2%에서 2024년 49.7%로 5년 사이 7.5%포인트 상승했다. 다만 2024년은 명목GDP 증가로 0.8%포인트 낮아졌다. 2024년 말 비금융 공기업까지 포함하고 공공부문 내부거래를 제거한 공공부문 부채(D3)는 1738조6000억원으로, GDP의 68.0%에 달했다. 한국전력이나 토지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의 부채는 결국 공공요금 인상이나 정부 지원, 국민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고령화가 빨라지며 연금·의료·복지 지출이 본격적으로 늘어날 참이어서, 같은 규모의 빚이라도 미래 세대가 짊어질 무게와 시장이 매기는 위험은 지금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환율은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1985년 미국은 무역적자 확대와 일본의 급부상에 맞서 주요 5개국과 플라자합의를 끌어냈고, 이후 엔화 가치는 단기간에 급등해 일본의 수출경쟁력과 경제정책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환율이 시장 수급뿐 아니라 강대국의 통상·외교·안보 전략에도 좌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미 연준이 상설로 통화스와프를 맺은 상대는 캐나다·영국·일본·스위스와 유럽중앙은행뿐, 한국은 그 명단에 없다. 안정적인 대외관계와 국제적 신뢰가 곧 외환 안전망의 일부인 이유다.

그렇다면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의 신뢰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외환 당국의 시장 개입이나 민간의 달러 매도 유도는 급격한 쏠림을 누그러뜨리는 응급처방일 뿐이다. 진짜 처방은 정부가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로잡고 재정적자를 통제하며, 국가채무와 공기업 부채를 함께 관리하는 데서 나온다. 통화정책도 물가·금융 안정을 흔들면서까지 경기부양에 매달린다는 인상을 줘선 안 된다. 재정과 통화의 건전성을 지키겠다는 원칙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재정건전성은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뜻이 아니다. 위기 대응이나 성장잠재력 확충에 필요한 교육·연구개발·사회간접자본 재원은 투입하되, 효과가 불분명한 선심성 지출과 반복 사업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새 지출에는 안정적인 재원을 함께 제시하고, 경기가 회복될 때는 적자와 부채비율을 낮추는 원칙을 제도로 못 박아야 한다. 공기업에 정부 사업을 떠넘기고 그 부채는 정부 장부 밖의 일로 치부하는 관행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그래야 재정 통계의 투명성과 정책에 대한 신뢰가 함께 높아진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이 구제금융의 대가로 요구했던 핵심은 결국 하나였다. 벌어들이는 범위 안에서 쓰고, 빚을 갚을 능력을 되찾으라는 것이었다. 당시가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차례였다면, 지금은 정부와 공공부문이 재정 규율을 다시 세울 차례다. 원화 가치를 지키는 힘은 외환보유액의 숫자만이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환율 상승을 뉴 노멀이라 부르며 체념하듯 적응할 게 아니라, 왜 원화에 대한 수요와 신뢰가 약해졌는지부터 직시해야 한다. 재정건전성과 통화 건전성, 그리고 안정적인 국제관계를 되찾는 것. 그것이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길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최창규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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