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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혜란 “한지 한 올 한 올 쌓아 올리는 과정, 수행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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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11. 17. 13:29

한·러 수교 35주년 기념 초대전, 오는 20일 삼청각서 열려
한지로 빚어낸 부조회화의 세계..."전통미술 가치 알릴 것"
물고기 노는 달항아리
엄혜란의 '물고기 노는 달항아리'.
한지를 한 올 한 올 쌓아 올리는 손길에서 태어난 입체 회화. 엄혜란 작가가 선보이는 '물고기 노는 달항아리' 연작은 평면과 조각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독특한 조형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 35주년을 맞아 오는 20일 서울 성북구 삼청각에서 열리는 이번 초대전에서 엄 작가는 전통 소재인 한지를 현대적 시각언어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공개한다. 작가 특유의 부조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을 드러내며 관람객과 소통한다.

엄 작가의 대표 모티프인 달항아리는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에서 출발했다. "장독대 항아리에 고인 물 위로 달빛이 비치고,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며 자랐어요.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꽃피우는 달항아리
엄혜란의 '꽃피우는 달항아리'.
15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12년. 산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예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구축해왔다. 핀셋으로 한지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고, 옻칠로 마무리하는 과정은 수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다.

"붓 대신 핀셋을 쥐고 작업합니다. 한지의 결을 살리면서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마치 수행 같아요. 밤을 새워가며 완성한 작품 하나하나가 제 삶의 흔적입니다."

작품 속 물고기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자유롭게 유영한다. 엄 작가는 이를 "내면세계를 떠도는 인간의 감정"에 비유한다. 달항아리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고, 물고기는 그 안에서 흐르는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항아리라는 제한된 세계 안에서도 물고기들은 제 갈 길을 갑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요.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가는 게 인생이죠."

엄혜란 작가
엄혜란 작가.
이번 34번째 개인전에는 달항아리 연작 외에 'City' 시리즈도 함께 선보인다. 항공기에서 내려다본 도시 풍경을 형상화한 이 작품들은 수많은 점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현대 사회의 구조를 은유한다. 자연에서 출발한 작가의 시선이 도시와 문명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작이다.

엄 작가는 2019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한국 화단에서 그 역량을 인정받았다. 전통 한지를 활용하되 평면 회화의 한계를 넘어선 입체적 표현은 심사위원들로부터 "부조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을 받고 나니 오히려 어깨가 무겁더군요. 하지만 그만큼 제가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도 생겼습니다. 한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조형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걸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기마토기상
엄혜란의 '기마토기상'.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부조회화'라 명명한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 경계에서 탄생한 독자적 장르라는 자부심이다. 실제로 작품들은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달라지며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을 자아낸다.

이번 한·러 수교 기념 전시 초대에 대해 엄 작가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한국 전통미술의 가치를 알리는 기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좋은 작품은 어디서든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화려한 전시장이나 조명보다 중요한 건 작품이 담고 있는 진심이에요."

두바이, 일본, 미국, 영국 등 해외 전시 일정도 줄줄이 예정돼 있다. 한지라는 한국 고유의 재료로 세계 미술계와 소통하겠다는 포부다.

물고기 노는 달항아리2
엄혜란의 '물고기 노는 달항아리'.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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