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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ld of Yesterday’ 한국 초연, 스티븐 허프와 함신익이 만드는 특별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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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1. 17. 08:00

유럽 문명의 기억을 담은 협주곡과 낭만·현대의 감성이 만나는 자리
관현악 ‘AGATA’부터 그리그 협주곡까지, 한 예술가의 세계를 통과하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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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허프 경. 이번 공연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The World of Yesterday'를 한국 초연으로 선보인다. / 사진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오케스트라
오는 2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함신익과 심포니 송의 마스터즈 시리즈 아홉 번째 무대는 스티븐 허프가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The World of Yesterday'를 한국에서 초연하는 특별한 자리다. 지휘는 함신익, 피아노는 허프가 맡으며, 오케스트라는 함신익과 심포니 송이 연주한다. 현대와 고전, 낭만주의와 개인적 서정이 한 무대에서 교차하는 이 공연은 2025년 시즌 전체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순간으로 꼽힌다.

함신익과 심포니 송이 올해의 정점으로 내세운 이 무대는 단순한 협연 무대의 범주를 넘어선다. 스티븐 허프라는 한 예술가가 지닌 깊이와 폭, 그리고 그의 음악 세계가 지닌 철학적·역사적 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프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수필가이자 사상가로 활동하며,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은 바 있는 독보적 예술가다. 또한 연주자 최초로 맥아더 펠로우에 선정되었고, '이코노미스트'가 뽑은 현존하는 다재다능한 인물 20인 중 유일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한 인물이 이처럼 넓은 경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음악을 들을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이번 무대는 작곡가 본인이 직접 자신의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허프의 피아노 협주곡 'The World of Yesterday'는 2024년 미국 유타 심포니와 영국 할레 오케스트라가 공동 초연한 신작이다.

유럽 문명이 간직한 감성과 사라져 가는 풍경을 음악적 언어로 회고한 이 작품은 이미 여러 국가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한국 초연과 동시에 아시아에서도 처음으로 울려 퍼진다. 지휘자 함신익은 이 곡을 "현대의 화법으로 고전적 형식을 품은 음악이며, 슈트라우스와 베르크의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정서"라고 설명한다. 이 곡이 현대음악이지만 이질적이지 않게 들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허프는 음악이 품을 수 있는 기억의 감각을 섬세하게 직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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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신익 지휘자. 30년에 걸친 인연을 이어온 스티븐 허프와 함께 마스터즈 시리즈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 사진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오케스트라
함신익과 허프의 만남은 30년 가까운 신뢰의 시간 위에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은 1995년 처음 함께 무대에 섰고,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함 지휘자는 그때의 허프를 두고 "기교를 넘어선 진심의 연주를 들었다"고 회상한다. 이후 오랜 세월 간 간헐적으로 이어진 협업은 이번 무대를 통해 더욱 긴밀하고 깊어졌다. 이는 단순한 초청이 아닌 예술적 신뢰와 인간적 우정의 확장으로, 프로그램 전체에 담긴 진정성 역시 이 인연 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날 무대는 허프의 작품 세계를 한 자리에서 집중 조망할 수 있는 구성으로 채워져 있다. 첫 곡인 관현악곡 'AGATA'는 'a Basque Fantasy for Orchestra'라는 부제처럼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현대적 화성과 관현악의 질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바스크 지역은 강한 리듬과 춤 기반의 민속 선율이 특징인데, 허프는 이 지역의 정서를 환상곡이라는 자유로운 틀 속에서 해체하고 다시 엮어낸다. 관현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몸처럼 움직이며, 타악기의 활약과 색채적 음향이 두드러진다. 특정 주제를 변주하기보다는 지역의 기운과 이미지의 파편이 온전히 살아 움직이는 느낌에 가깝다. 관객에게는 낯선 지형을 음악으로 건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북유럽 낭만주의의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처음 울리는 팀파니와 피아노의 도입은 이미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1악장은 힘 있고 개방적인 선율 속에서 자연의 야성적 에너지와 서정적 단단함을 모두 품고 있으며, 2악장은 내밀하고 투명한 감성을 중심으로 한 휴식의 공간이다. 3악장은 노르웨이 민속춤에서 영감을 받은 리듬감으로 관객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다.

허프의 해석은 특유의 절제된 표현과 음색 조절로 이 작품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넣을 가능성이 크다. 화려한 속주보다 음색과 구조를 우선하는 그의 연주는 이 곡의 낭만적 감정을 다른 결로 비춰줄 것이다.

후반부의 핵심은 허프의 피아노 협주곡 'The World of Yesterday'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음악이 아니다. 허프는 유럽이라는 문화적 공간이 축적해 온 문명적 감성과 그 쇠퇴의 정서를 음악적 구조 안에 깊게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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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신익과 심포니 송. 창단 11주년을 맞은 오케스트라는 허프의 음악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 사진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는 종종 기억의 층위를 쌓아 올리는 듯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피아노는 그 사이에서 내밀한 목소리로 길을 찾는다. 고전적 틀을 바탕으로 하지만 선율과 화성은 분명히 현대적이며, 감정의 결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든다. 슈트라우스적 관현악의 광택과 베르크의 긴장 사이에 존재한다는 함신익의 해설은 작품의 성격을 정확히 짚어낸다. 청중은 난해함보다 익숙함을 먼저 발견하고, 그 익숙함 뒤에 숨어 있는 현대적 감각을 다시 찾아내게 될 것이다.

특히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낭만주의 협주곡과 현대 협주곡을 한 자리에 세운다는 구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기획이다. 그리그의 정서적 직조와 허프의 사유적 음악이 이어지며, 거장의 두 얼굴인 연주자 허프와 작곡가 허프가 하나의 서사 안에서 맞닿는다. 여기에 'AGATA'가 더해지며 전통과 현대, 지역성과 개인적 서정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심포니 송에게도 이번 무대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창단 11주년을 맞은 이 오케스트라는 민간 주도의 지속 가능한 음악 생태계를 구축해 온 팀으로, 젊은 연주자들과 독립적 기획력으로 성장해 왔다. 함신익 지휘자는 이번 공연을 두고 "심포니 송이 성숙한 단계를 넘어 새로운 칼라와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자리"라고 설명한다. 세계적 거장과의 협업이 단순히 초청의 의미를 넘어 오케스트라의 미래 비전을 분명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날 무대는 예술가와 인간, 전통과 창작,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기념비적인 밤이 될 것이다. 허프가 직접 들려주는 두 협주곡과 관현악 작품, 그리고 이를 이끄는 함신익과 심포니 송의 연주가 맞물리며 음악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다시 태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연이다. 관객에게는 한 작품을 듣는 경험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세계를 통과하는 경험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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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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